출발점
어리석게도 오랫동안 저는 나르시시스트를 온라인상의 괴담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저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상대를 만났습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느꼈던 무례함은 매번 모임을 마칠 때마다 남는 까닭 모를 찜찜함으로 심화되었습니다.
인지적 유연성이 부족한 사람들은 항상 있었지만, 거기에 비상식적인 특권의식까지 결합한 부류는 처음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정말로 세상에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자기중심적이고, 과시는 결핍이라는 명제를 온몸으로 증명하며, 능력에 비해 인정욕구가 비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요.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갈망 때문에 도리어 초라해진 사람을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니 나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떠올린 생각이 새로운 장편의 초석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컨셉
여자주인공
가족이 주입한 ‘이해 불가능한 세계’는 평생 그를 지배해왔습니다. 끝없는 당혹감과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 속에서 스스로 탓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뒤틀린 무대에서 갈팡질팡하며 느낀 무력감은, 역설적으로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대화가 불가능하다면 대화를 끊고, 공감이 불가능하다면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혼란의 마침표를 찍고, 자신을 갉아먹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관계와 작별하며 성장합니다.
남자주인공
편견과 확신에 찬 그의 오만함은 어린 시절의 지독한 결핍이 만들어낸 단단한 껍데기였음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맹목적인 믿음 끝에 마주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놓쳐버리게끔 만든 커다란 오해였습니다.
그는 과거의 그림자를 지우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그 결과 앞에 겸허히 서고자 합니다. 사무치는 후회를 동력 삼아 스스로 무너뜨린 것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 속죄합니다.
“가족”
그의 기준은 늘 타인에게 있습니다. 끝없는 비교 지옥에 갇혀 상대의 행복과 성공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렸습니다.
남을 공격해야만 달래지는 불안함과 우월감으로 포장한 열등감은, 오로지 무례함으로 표출되어 스스로를 불태울 뿐입니다.
“변호사”
선량하고 고결한 마음씨를 지닌 그는 모순적이게도, 오만한 남자의 조력자이자 무력한 여자의 수호자입니다.
▶ 가상의 배경
19세기 벨기에로부터 영향을 받아 산업화 시대의 영국과 프랑스를 섞은 가상의 왕국입니다. 북부에는 한창 산업화의 바퀴가 굴러가는 도시와 공장이 위치해 있고, 기후가 완전히 다른 남부에는 거대한 농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이번 장편을 쓰면서 여러 책을 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구상에 영향을 준 개념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적 서열화(Narcissistic Hierarchization)
나르시시스트에게 인간관계는 동등하지 않습니다. 모든 상대를 서열로 분류합니다. 따라서 잘난 사람에게 열등감과 부러움을 느끼며, 그 권위에 기생하는 동시에 깎아내리려는 상향비교가 발생합니다.
투사(Projection)
흔히 “착하고 예쁘고 똑똑한 나를 다른 사람들이 질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투사에 불과한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자신의 결핍을 외부로 투영하는 자기방어의 일종입니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을 목격했을 때 안도하거나 기쁨을 느끼는 심리를 뜻합니다.
도덕적 허가(Moral Licensing)
스스로 도덕적 우월감을 느껴 이후의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심리입니다.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로 경쟁해서 상대를 이길 수 없을 때 그 초라함을 가리고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상대를 고립시키려는 의도 역시 내포합니다.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
능력이 부족할수록 본인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고,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현상입니다. 반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 과소평가합니다.
영향과 흔적
현대물(로 구상했던 것)
가벼운 현대 배경 소설을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이번 여자주인공의 직업은 수학 교사였습니다. 나중에 바뀐 세계관에 따라 용이한 전개를 위해 설정을 변경했습니다만, 그 흔적이 25화에 남아있습니다.
속임수 왕후
고려시대 배경이었던 전작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게 이번 장편과 합쳐졌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9화와 14화, 27화에 흔적이 남았습니다.
배롱나무처럼 붉은색
전작의 후반부를 쓰던 도중에 이번 장편의 중심 소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마무리
사실 역사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여러 이유로 인해 이번 장편을 먼저 완성했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 계기부터 출간 과정까지, 그 모든 경험이 유의미했습니다. 덕분에 저의 불쾌한 의아함은 맥빠진 동정심으로 변화하며 매듭 지어졌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다음 이야기는 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는 항상 쓰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전부 읽어주신 분께 마지막으로 진심 어린 인사를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