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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궁의 어진 덕은 문왕文王의 후비보다도 뛰어나다. 동궁에서부터 느끼기를, 그 착한 생각과 덕이 진실로 가상하였다.” 무작금은 대뜸 팔불출처럼 전교하였다. “우리 중전께선 한 나라의 국모로 임한 뒤로도 한결같다. 그러한 미덕을 널리 알려 만백성의 풍속을 밝힐 근본으로 삼노라.” 얼른 받아쓰라고 연신 승지를 닦달했다. “선왕께서 안목이 뛰어나시어 현비賢妃를 간택하셨음을 크게 드러내어 제술製述하라.” 왕후의 어진 행실을 중외에 널리 반포하였다. 또한 외척들에게 포상을 내려 사대부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과인의 거조擧措가 사사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친히 말하지 않으면 바깥에선 알아주질 않으니 깨우치는 것이니라.” 받아적던 승지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걸로 모자랐는지 무작금은 한술 더 떴다. 옥책을 친히 내리는 자리까지 마련한 것이다. 전례가 없는 일이라 아예 절차까지 만들었다.
배롱나무처럼 붉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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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내가 황금으로 비석을 세워도 되겠습니까?” “황금으로 뭘 세우신다고요?” “아침에 중전한테 옥책을 내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가 말했다. “중전의 덕은 곧 공덕이니 금정金鼎으로도 새기면 좋겠다고….”
배롱나무처럼 붉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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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저(關雎) ·규목(樛木)에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의 덕이 지극하거니와, 이제 중궁(中宮)의 어진 덕이 옛일보다 나아서,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착한 의표(儀表)와 착한 덕이 진실로 가상하다. 대저 사람은 처음에는 잘하나 끝까지 잘하는 이가 드물거늘, 한 나라의 국모로 임한 지가 지금 10여 년이 되었는데, 마음을 얌전하게 가져 시종이 한결같았으니, 그 아름다움을 포양(褒揚)하여 풍속을 밝히는 근본으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내가 듣건대, 세조(世祖)께서 소혜 왕후(昭惠王后)를 특별히 효부(孝婦)라고 포향했다 하니, 그 어진 행실이 있어서이다. 이제 중궁의 덕행(德行)이 이같으매, 옥책(玉冊)253) 을 가(加)하여야 하리니,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전문(箋文)254) 을 바치고 하례(賀禮)를 올리게 하고, 대비전에 진연(進宴)하고, 이어 중궁의 여족(女族)은 안에서 남족은 외정(外庭)에서 공궤(供饋)하여 은전(恩典)을 보이라. 또 신승선(愼承善)에게 추은(推恩)하여, 밝혀 포상하고 드러내어 후세에 보여, 사대부(士大夫) 집으로 하여금 공경하여 본받는 바가 있게 하라. 그 옥책문(玉冊文)은 김감(金勘)·임사홍(任士洪)·조계형(曺繼衡)으로 하여금 옛일을 인용하고 오늘날을 서술하되, 한편 문왕의 후비 및 전대의 후덕(后德)을 인용하여, 중궁이 어진 덕이 있어 능히 아래에 미치고 남의 소생을 자기 소생처럼 어루만져서 내교(內敎)를 이룩하고 능히 세자를 낳아 국본(國本)을 자리잡게 한 데에 미치며, 또 성묘(成廟)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하심이 계시어 후사(後嗣)를 위하여 현비(賢妃)를 간택하신 아름다움을 서술하되, 크게 드러내어 제술(製述)하게 하라. 이제 나의 이 거조(擧措)가 비록 사사에 치우침에 가깝기는 하나, 내가 말하지 않으면 밖에서는 알 수가 없으므로, 이처럼 삼가 깨우칠 따름이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6월 7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전교하기를,
"공덕이 있는 자는 이정(彝鼎)에 명(銘)하는 것이 옛 법이다. 이제 중궁의 덕이 금정(金鼎)에 새길 만하니, 존숭(尊崇)하고 옥책(玉冊)을 내릴 때에 아울러 금정을 내리라. 정을 황금으로 부어 만들되 1천 냥을 써야 한다."
하였다.
그때 국고[國儲]가 이미 비어서 크게 장사꾼의 금을 뒤져내는데, 유사(有司)가 엄히 독촉하여 마구 매질하니, 금이 없는 자는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혹 목매어 죽은 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