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신비는 무람없이 술동이를 빼앗았다. “금일은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시느라 꾀병을 부리셨사옵니까?” “할 일이야 많았지.”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금은 다른 술동이를 집었다. “어차피 들어주지도 않는 사람 상대하면서 질리지도 않느냐?” “전하께선 비록 들어주지 않으시지만, 물리치지도 않으시니까요.” “…그래, 참 이상하지.” 무작금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대간들이 날 비판하는 건 못 견디겠거든. 내가 집구석에서 뭘 하든 저까짓 놈들이 뭐라고 지적질인지….” 면전에 너나 잘하라고 쏘아붙이고도 남을 심보였다. “한데 넌 달라.” 그가 중얼거렸다.

배롱나무처럼 붉은색

</aside>


폐부(廢婦)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9월 2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강미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