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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쫓겨갈수록 폐비의 집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들짐승이 기웃거렸다. 심지어 도둑이 들어 있지도 않은 세간마저 털어갔다. 도적이 행패를 부리다가 떠날 때까지 폐비는 낡은 걸쇠를 움켜잡고 벌벌 떨었다. 이튿날,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한 신료들이 폐비의 이웃을 심문하고 담이라도 제대로 세워주자고 대전에 청했다. “스스로 조심하지 않아 도둑을 맞았거늘 뭐 하러 이웃을 추문하겠소?” 왕은 퉁명스레 반박했다. “아이고, 한양서 도둑맞은 집이라면 죄다 담을 쌓아 줘야겠소이다.” 살천스러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폐비를 용서하고 복위시키라는 주청은 끊이질 않았다.

배롱나무처럼 붉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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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판윤(判尹) 정문형(鄭文炯)이 아뢰기를,

"신(臣)이 듣건대, 도적이 윤씨(尹氏)의 집에 들어가서 상자를 열고 물건을 가지고 갔다 하는데, 신(臣)의 생각으로는 사면(四面)이 모두 조관(朝官)의 집이므로 본래 불량(不良)한 사람이 없을 테지만, 어찌 도적이 남의 집을 넘어 들어와서 도둑질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웃 사람을 추문(推問)하고 또 그로 하여금 담을 쌓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신(自身)이 도적을 방비하지 않고서 도둑을 맞았는데, 또 어찌 이웃 사람을 추문(推問)하겠는가?"

하였다. 장령(掌令) 성건(成健)과 정언(正言) 유인호(柳仁濠)가 아뢰기를,

"비록 성상께서 쓰는 의복(衣服)·거마(車馬) 등의 물건이라도 오히려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지존(至尊)에게 배필(配匹)이 되었던 분의 것이겠습니까? 담을 쌓아서 도적을 방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담을 쌓도록 해야 하겠는가?"

하자, 정문형(鄭文炯)이 아뢰기를,

"방리(坊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도둑을 맞은 일로 인하여 윤씨(尹氏) 집의 담을 쌓도록 한다면, 서울 안의 도둑을 맞은 집들도 담을 쌓도록 하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