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새해에는 품계가 올랐다. 원자를 봉할 때부터 이야기가 나오다가 이 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무리된 것이다. 더는 올라갈 곳이 없는 빈(嬪, 내명부 정1품의 후궁)이었다. 의宜자를 써서 의빈이라 하였다. 간택 후궁들처럼 궁호를 따로 받진 않았다.
빈호嬪號를 정할 땐 희한한 일이 있었다.
왕은 처음에 대신들더러 정해오라 시켰다. 하여 좌의정과 우의정은 머리를 싸맨 끝에 아뢰었다. 밝을 철哲, 클 태泰, 넉넉할 유裕, 일으킬 흥興, 편안할 수(綏, 혹은 깃발 늘어질 유). 이렇게 다섯 글자였다. 그런데 왕은 전부 퇴짜 놓더니 이내 하교하였다.
“마땅할 의宜자로 정하겠소.”
소식을 들은 덕임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옷소매 붉은 끝동
</aside>
(중략) 정일상이 아뢰기를, “소용(昭容)에게 올릴 작호(爵號)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하였다. (후략)
일성록 (정조 7년 2월 19일, 한국고전번역원 조순희 역)
해청(該廳)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어 좌의정 이복원(李福源)과 우의정 김익(金熤)에게 가서 물으니, ‘덕종대왕(德宗大王)의 어첩(御牒)에 대한 일로 문의(問議)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국조(國朝)의 전례(典禮) 중에는 의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삼가 보감의 별편(別編)을 상고해 보면 남(男) 자로 쓰는 것이 예(禮)의 뜻에 맞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대신이 논의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