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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전하를 어떻게 못살게 굴었는데요?” 일단 좀 달랠 요량으로 신비는 더듬더듬 물었다. “즉위한 이래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중이지.” 왕이 분기탱천했다. “아바마마의 묘호(廟號)를 정할 때도, 힘겨루기할 속셈으로 기껏 내가 고른 글자를 반대하더라.” 그가 이를 갈았다. “여태 무시당했던 폐비의 기일을 챙기고 소찬(素饌)이나마 올리도록 명했을 때도 발작하더니만….” 신왕이 뿌리를 높여 위상을 다잡는 일이야 색다를 게 아니다. 한데도 대간들은 격렬하게 반대한 모양이다. 당신의 사후에도 결코 폐비를 높이지 말라던 선왕의 뜻에 반하는행동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래도 난 기어코 아바마마의 묘호를 내 뜻대로 정했다.” 왕이 말했다. “또한 아예 내 모후인 폐비를 추존하고 버려진 묘소를 천장(遷葬)하라고 명했지.” 반대당할 때마다 보란 듯이 더 세게 나갔다는 뜻이다. “…괜찮으시겠사옵니까?” 신비는 걱정이 앞섰다. “뭐, 대간들에게는 선왕의 유지라는 강력한 명분이 있지.” 정통성이 바르게 선 강한 임금으로 발돋움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부왕의 유언이라는 모순만은 어쩔 수 없는 셈이다. “…하지만 난 내 어미의 아들이다.” 왕이 울컥했다. “십수 년째 방치된 폐비의 묘소를 둘러본 내시가 고하더라. 봉분이 허물어져 해골이 삵에게 먹힐 지경이라고….” 분노 사이로 끔찍한 슬픔이 보였다. “아들인 나마저 모른 척한다면, 도대체 누가 그 불쌍한 여자를 챙겨주겠느냐?” 신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령 반대하면 용서 없이 참하겠다고 경고해도 들어먹지를 않더라.” 곧 왕은 허탈하게 웃었다.
배롱나무처럼 붉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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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御書)를 승정원에 내리고 이르기를,
"내가 내시를 보내서 폐비(廢妃)의 묘(墓)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묘소가 무너진 채 여러 해를 수축하지 않아서 장차 해골이 나와서 여우와 삵에게 먹히게 될 지경이라 하니, 비록 사대부의 묘소일지라도 이와 같아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천승(千乘)의 나라 임금의 어머니임에랴. 자식된 정으로는 차마 듣지 못할 바이므로, 모름지기 길(吉)한 연월일시(年月日時)를 가려 천장(遷葬)해야 할 것이니, 불가하다고 말하는 자는 용서 없이 참하리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폐비(廢妃)의 묘를 세밀히 조사하여 치제(致祭)하지 않았으니, 내가 매우 마음 아프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말라. 관찰사도 신하이니, 때때로 친제(親祭)하여야 된다."
하매, 승지 등이 아뢰기를,
"묘소를 옮기는 일에 대하여는 전지(傳旨)를 만들어서 예조(禮曹)에 내리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또 다만 명절에만 제사지내는 것은 불가하니, 이 뒤로는 또한 삭망전(朔望奠)을 행하도록 할 것을 아울러 전지(傳旨)에 기록하라. 전일 의논을 드린 신하 중에 안침(安琛) 같은 무리가 소위 정직한 발의를 했다는 것은 매우 불가하니, 지금 만약 이 일을 불가하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나의 신하가 아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2년 윤3월 13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