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img src="/icons/bell-notification_red.svg" alt="/icons/bell-notification_red.svg" width="40px" /> 3월 23일 <배롱나무처럼 붉은색> 출간
</aside>
배롱나무처럼 붉은색은 조선 연산군과 그의 아내 폐비 신씨를 모티프로 삼은 가상의 역사물입니다.
저는 사료를 통해 접한 ‘폐비 신씨’라는 인물을 묘사할 핵심적인 낱말을 ‘헌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헌신을 의녀라는 비유적인 장치로써 표현하고 해석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무렵, 저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될 짧은 단편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마침 공부하던 전공서에 적어두었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펼쳐 보지 않았고, 그대로 덮어둔 채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사를 준비하다가 먼지 쌓인 전공서를 다시 펼쳐 보게 되었습니다. 버리기 전에 한번 들춰봤다가 묵은 기억을 떠올렸고, 이를 확장해 장편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7년 늦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배롱나무처럼 붉은색은 지금까지 제가 완성한 모든 장편 중에서 가장 힘든 글이었습니다. 상황이 조금만 달랐다면 아마 이 글은 영원히 미완으로 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비록 8년이 걸렸습니다만 그래도 완성할 수 있어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이 이야기를 독자님께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은 훨씬 더 커다란 기적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연산군의 모티프를 희석하기 위하여 배롱나무처럼 붉은색을 가상의 이야기로 변경하면서, 주인공 폐비 신씨의 설정도 일부 바뀌었습니다.
언젠가 중종실록을 읽던 중 당대에 ‘신비’라는 의녀가 존재했다는 짤막한 기록을 접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신씨 성의 비를 중의적으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을 떠올렸고, 의녀라는 특수한 직업 자체를 폐비 신씨의 헌신을 비유할 장치로 써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과 함께, 최종 완성까지 배롱나무처럼 붉은색의 주축이었던 다섯 가지의 사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폐부(廢婦)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9월 2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교동 수직장 김양필·군관 구세장(具世璋)이 와서 아뢰기를, "초6일에 연산군이 역질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죽을 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년 11월 8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와서 아뢰기를, "중국 조정에서 만약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일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폐하여 사제(私第)에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 가하다. 만약 끝까지 묻거든 근심에 시달리고 파리해져서 죽었다고 대답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4년 1월 8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왕이 전부터 면창(面瘡)이 나서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중국에 가서 약을 구하여 오게 하였더니, 웅황 해독산(雄黃解毒散)과 선응고(善應膏)를 얻어 왔다. 마침 사비(私婢) 만덕(萬德)이 또한 이 창이 있었으므로, 의원 송흠(宋欽)을 시켜 먼저 시험하게 하였더니, 자못 효험이 있으매, 불러서 물으니, 만덕이 말하기를 "지난해 4월에 면창이 나서 침을 맞은 뒤에 상회수(桑灰水)로 씻고 또 한수석(寒水石) 가루와 호동루(胡桐淚) 가루와 웅황(雄黃) 가루를 발랐으나 효험이 없더니, 이달 11일에 웅황 해독산을 온수(溫水)에 타서 씻고 또 선응고를 붙이니 고름이 많이 나오고 조금 가려워서 긁고 싶더니 서너 번 갈아 붙이자 날로 나아가서, 두 개의 작은 구멍이 쌀알만하게 남고 결핵(結核)이 개암 열매[榛子]의 크기만 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우제(虞祭)는 내가 마땅히 친히 행하는 것이 예(禮)인데, 지금 이 약을 써서 만약 낫게 된다면 어찌 좋지 않으랴." 하매, 송흠 등이 아뢰기를, "만약 내복약(內服藥)이라면 타국에서 지어 온 것을 함부로 쓸 수 없지마는 겉에 바르는 약은 써도 무방할 것인데 하물며 시험하여 효력이 있음에리까." 하고, 승정원 및 내의 제조(內醫提調) 등이 아뢰기를, "이 약은 독이 없으니, 신들의 생각에도 역시 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리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부고사(訃告使)를 따라가는 의원으로 하여금 많이 사 오게 하고 아울러 제법(劑法)까지 물어 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 1월 20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성세명(成世明)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臣) 등이 듣건대 중부(中部)의 민가(民家)에 세 발이 달린 암탉이 있는데, 물건이 괴상하고 심히 이상하다고 하니, 몹시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중략) 신 등이 듣건대 지난 달 15일에 자수궁(慈壽宮)에서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키니, 관(官)에서 장막(張幕)을 설치하고 도로(道路)를 닦았으며, 내명부(內命婦)와 종실 부녀(宗室婦女)가 앞을 다투어 가서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도성 안에서 공불(供佛)함은 나라에 금령(禁令)이 있는데, 더구나 자수궁(慈壽宮)은 바로 선왕(先王)의 후궁 처소(後宮處所)이니, 또한 하나의 금액(禁掖)입니다. 정업(淨業)과 같지 않은데, 향화(香火)를 일로 삼았으니, 어찌 범석(梵席)을 널리 베풀어 부녀(婦女)를 떼 지어 모이게 하고, 여리(閭里)를 용동(聳動)시키어 사람의 청문(聽聞)을 놀라게 함이 옳겠습니까? 요사이 흥복사(興福寺)에는 승도(僧徒)와 부녀(婦女)가 분잡하게 뒤섞여서 많은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된다고 하는데, 이제 또 이런 일이 있어 성치(聖治)에 누(累)를 깊게 하니, 통심(痛心)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세 발이 달린 닭이 바로 부인의 말을 쓴 응험(應驗)이라고 하나, 내가 부인의 말을 들은 일이 없으니, 이제 이 닭의 요괴한 일이 나에게서 말미암은 것인지 대신(大臣)에게서 말미암은 것인지 소민(小民)에게서 말미암은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만약 말하기를, ‘불사(佛事)로 인하여 응험(應驗)이 있다.’고 한다면, 세조(世祖)께서도 불사(佛事)를 숭봉(崇奉)하였으니, 그 때에 마땅히 나왔어야 할 것이다.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에 이른바, ‘아무 일을 얻으면 아무 아름다운 징조가 응(應)하고, 아무 일을 잃으면 아무 재앙의 징조가 응한다.’고 하였음은 선유(先儒)도 또한 교고(膠固)한 불통지론(不通之論)이라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그 불사(佛事)는 내가 아는 바가 아니며, 종실(宗室)의 부녀(婦女)가 비록 혹 가서 참석하였더라도 어찌 나에게 고(告)하겠는가? 그대들은 만약 한 가지 일을 들으면 반드시 허물을 나에게 돌리니, 어째서인가?"
하였다. (중략)
"옛사람들은 요물(妖物)이 비록 원방(遠方)에 있더라도 모두 지적하여 군상(君上)의 잘못이라 하였는데, 더구나 이 경도(京都)에 있음이겠습니까? 하필이면 궁금(宮禁)에 있은 뒤에야 요물이 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재이(災異)의 일은 모두 내가 불러일으킨 것이다."
하고, 이어서 정원(政院)에 명하여 요계(妖雞)를 취(取)하여 오게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25년 10월 9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이밖에도 전개의 근간이 된 사료가 많아서 추후 따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남일·신동원·여인석, 한 권으로 읽는 동의보감, 들녘, 1999 이석간·채득기·박렴·허임,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박상영·차웅석·윤석희·노성완 옮김, 미상 이창우, 수세비결壽世祕訣,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이정화·김봉남·양원석·안세현 옮김, 1929 한재덕, 본초유함요령本草類函要領,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권오민·오준호 옮김, 1833 이진태, 단곡경험방丹谷經驗方,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이정화·김홍균·권영배·강동윤·정현철 옮김, 미상 의성당 편집부, 신농본초경, 의성당, 2012 작자미상, 경보신편輕寶新篇, 한국한의학연구원, 오준호·구민석 옮김, 미상 맹선, 국역 식료본초, 한국한의학연구원, 구자훈·한민섭 옮김, 2018 노화, 국역 식물본초, 한국한의학연구원, 구자훈·한민섭 옮김, 2018 이경화, 광제비급廣濟秘笈, 한국학의학연구원, 한민섭 옮김, 1790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호산청일기, 민속원, 2007 국사편찬위원회, 성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연산군일기 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순조실록 박훈평·오준호, 15-16세기 조선 의학 관료의 신분 변천: 양성이씨 세전 사례를 중심으로, 대한의사학회, 2018 정승호·김수진, 음식과 질병을 통해 본 조선왕들의 생로병사에 관한 연구, 한국외식산업학회, 2016 한희숙, 의녀, 문학동네, 2012 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예종.성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
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연산군일기, 휴머니스트, 2005 김범,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2010 신봉승, 시인 연산군, 선, 2000 김상보, 조선의 밥상, 가람기획, 2023
<옷소매 붉은 끝동> 외 출간
🌐 WEB: kangmikang.com
처음 옷소매 붉은 끝동 출간 때부터 너무나도 좋은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오랫동안 새로운 장편을 출간하지 않을 때 제 근황을 궁금해해주셨고, 정성어린 편지를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과 그 자매작(잔나비 공주 애사/속임수 왕후)을 완성한 이후로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본업에 집중해야 할 때였고 약간의 침체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분들께서 계셨기에 또 하나의 장편을 완성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옷소매 붉은 끝동의 개정판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전환점을 겪었습니다. 또한 배롱나무처럼 붉은색을 쓰다가 막혔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매작으로 시작했던 무관심의 역방향 역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 분이라도 찾아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 이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