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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은 왕세자를 세워 명분을 바로하고 국운을 안온케 이어가고자 한다.” 착한 원자에게는 세자 책봉이라는 훌륭한 보상이 주어졌다. 사정전에서 책문을 읽었다. 금보와 옥책이 내려왔다. 동시에 휘자를 받들었다. 장차 임금의 이름이 될 글자였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처럼 마음이 큰 사내가 되어라.” 훗날에는 피휘하느라 아무도 거론하지 않을 명이었다. 부왕께서는 비천한 아명을, 자식이 건강하길 소망하며 어미가 지어준 간곡한 이름을, 깨끗이 지우셨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조종의 빛나는 발자취를 따라갈지어다.” 왕이 말했다. “깊은 못을 건너고 살얼음을 밟듯이….” 무심코 무작금은 어미의 차가운 품을 떠올렸다. 주변의 공기마저 내려앉아 버린 양 스산한 침묵을 돌이켰다. 그러나 이제 어미는 진실로 깊은 못이요, 얇게 언 살얼음이었다. 실수로 발을 잘못 디디지 않기 위해 전부 잊은 척해야만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정녕 잊지는 아니하였다.

배롱나무처럼 붉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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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경복궁(景福宮)에 거둥하여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왕세자를 책봉하였다. 그 책문에 이르기를,

"세자를 세워 여정(與情)을 붙잡아 매는 것은 대본(大本)을 위함이며 주기(主器)에는 맏아들만한 자가 없으니, 이는 실로 큰 이륜(彝倫)다. 이에 지난날의 법도를 상고하여, 금보(金寶)·옥책(玉冊)을 내리노라. 아! 너 이융(李㦕)은 그 경사 창진(蒼震)에 응하였고 그 상서 황리(黃離)에 부응했도다. 나면서부터 영리하여 일찍부터 인효(仁孝)의 성품이 현저하고, 총명이 날로 더해 가 장차 학문의 공이 융성할 것이니, 마땅히 동궁(東宮)에서 덕을 기르고 대업을 계승할 몸임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너를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아! 이에 총명(寵命)을 받았으니, 더욱 영구한 계책을 생각하라. 간사함을 멀리하고 어진이를 친근히 하여 힘써 스승의 아름다운 가르침을 지키고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조심하여 조종(祖宗)의 빛나는 발자취를 뒤따르면,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4년 2월 6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강미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