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화상아! 내가 눈을 뗀 사이 또 무얼 하고 온 게야?”
아무 짓도 안 했다며 어물어물 항변하는 덕임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서 상궁은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상선 영감이 네게 이걸 주라 하시더라. 주상전하께서 하사하셨단 다. 뭐냐? 전하께서 널 어찌 아셔?”
검은 줄로 단정하게 엮은 네 권의 책이었다. 첫 권의 흐린 밤색 겉장 에는 단정한 글씨로 《여범女範》이라 쓰여 있었다. 효녀며 현숙한 아내가 되는 법 따위를 망라한 규방의 언문 훈육서였다. 사대부 규수들이 익히는 책 말이다. 앉으란다고 진짜 무릎에 앉은 걸 점잖게 꾸짖고자 이걸 주셨나 뜨끔하여 덕임은 책장을 넘겨보았다. 겉장 안쪽에 장서인(藏書印, 책의 소유를 밝히기 위해 찍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붉은 인장의 글자를 읽는 순간 가슴이 덜컥 떨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밤 차가운 흙 아래 묻힐 후궁의 인장이었다. 첫 바닥을 읽 자 충격은 더 커졌다. 단순히 후궁이 소장하던 책이 아니었다. 그녀가 친히 저술한 책이었다. 늙은 왕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궁체를 아주 잘 썼다. 물 흐르듯 유려하고 비단결처럼 세련된 글씨였다.
한낱 어린 궁녀의 차지가 되기에는 귀한 책이었다.
옷소매 붉은 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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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이씨는 조선 영조 임금의 후궁이다. 본래 대비전의 궁녀였으나 효장세자가 요절하여 후사를 걱정하던 영조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 그의 자녀로는 화평옹주, 화완옹주, 사도세자 등이 있다. 이중에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후일 조선 정조 임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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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이씨는 언문서 <여범>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다양한 여성의 삶을 보여주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여성에게 주목했다는 특징이 있어 당대의 다른 규훈서와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